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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 꽃피운 영성의 향기-트루디사모

2012.01.26 13:21

조회 수:2404 추천:4



삶으로 꽃피운 영성의 향기

한국 땅에 심겨져 활짝 꽃 피우기까지 55년의 삶을 지내온 트루디 사모와의 만남

  

        
선교사를 꿈꾸던 소녀

1959년 12월 12일 저녁, 남편 김장환 목사를 따라 19일간의 긴 항해 끝에 부산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트루디 사모는 자신이 뿌리내려야 할 땅, 한국이 실감 나지 않았다. 그저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는 곳은 어디든 가겠다는 마음이었고, 그 헌신의 길목에서 사랑하는 한국인 남편을 만났을 뿐이다. 가난과 황폐함이 도처에 있었지만 미국과는 전혀 다른 눈앞의 광경이 실망스럽기보다 낯설고 신기했다. ‘이곳이 나의 선교지구나!’
트루디 사모의 중학생 시절, 빌리그레함 목사님의 전도집회 때 받은 은혜가 아직도 뜨거웠다. 구원의 감격에 겨워 오직 하나님 뜻대로만 살겠다고 수없이 고백했던 것이 고등학교 때는 선교사로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졌었다. 큰 오빠 롤런드가 아프리카 짐바브웨로 의료선교를 떠난 것도 그녀의 가슴에 불을 댕기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 후 기독교 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가며 착실하게 말씀 안에서 사는 법을 배워갔다.  

빌리(김장환 목사님의 미국식 이름)를 만난 것도 기독교 학교인 밥 존스 대학에서였다. 6·25 동란 때 무작정 미군을 따라다니며 일을 하던 하우스보이 김장환 목사를 미군 파월스씨가 거두어 미국에서 공부시킨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김장환 목사는 파월스씨의 헌신적인 뒷바라지 아래 기독교 고등학교를 마치고 밥 존스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스포츠와 각종 웅변대회를 휩쓸며 학교에서 스타가 된 빌리의 마음에 160센티 정도의 아담한 키에 갈색 머리를 한 트루디 사모가 눈에 들어온 것은 하나님의 큰 섭리였을 것이다. 둘은 신실하고 깊은 서로의 인격과 신앙에 끌려 장래를 약속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의 결혼을 인도해 주시길 함께 기도했다. 그때만 해도 국제결혼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어서 많은 난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과정을 순적하게 이루어 가셨다.
"너무 신기했어요. 그래서 더 하나님의 뜻이라고 느끼게 되었죠. 가족들 모두가 환영했고, 처음엔 태어날 아이들 걱정에 반대하셨던 어머니도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니 따라주셨어요. 둘이 열심히 살면서 선교하라고, 그렇게 축복하며 보내주셨어요.”

시댁을 선교지로

낯선 한국 땅에도 크리스마스가 돌아오고 있었다. 도착한 인천항에서 처음으로 시댁 식구들을 만나기 위해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동안 왠지 모든 것이 안성맞춤인 듯 느껴졌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낯선 세상에 친히 오신 것처럼, 트루디 사모는 자신의 삶이 그렇게 드려져야 한다는 것을 예감이라도 했던 것일까. 그녀는 그 와중에도 전도하기 참 좋은 계절이라는 생각을 했다. 남편이 미국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돌아올 만큼 그렇게 안타깝게 가족들의 구원을 염원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녀는 자신의 선교지가 바로 남편의 땅 한국이라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녀의 그런 마음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셨는지 한국 땅은 예상과 달리 너무나도 따뜻하게 그녀를 맞아주었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10년 만에 목사님을 만난 거예요, 막내아들을요. 너무 반가우셔서 껴안고 눈물을 흘리며 맞아주셨죠. 그런데 돌아서서 저를 안아주시더라고요. 그렇게 저를 환영해주셨어요. 제가 키가 작고 크지 않아 좋으셨대요. 머리도 노랗지 않고 흑갈색이어서 친숙했다고요.”

어머니는 미국에서 아들이 틈틈이 부친 돈을 모아 한복과 이불을 준비하시고 자신이 쓰던 방을 선뜻 내 주실 만큼 새 며느리에게 마음을 써주셨다. 비록 대가족 14명이 방 세 칸 초가집에서 살아야 하는 열악한 환경인데다 음식이나 생활방식 등 무엇 하나 맞는 것이 없었지만, 시댁식구들의 따뜻한 환영에 마음이 열리고 보내심에 대한 사명의 확신으로 그 모든 불편을 감수할 수 있었다. 달리 생각해보면 세 살배기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함께 살고 있으니 다른 선교사들처럼 따로 언어학교에 갈 필요 없이 생활 속에서 마음껏 한국말을 연습할 수 있는 것도 은혜라 여겨졌다.
미국에 있는 가족들이 그립고 보고 싶을 때는 그곳에서 가져온 타자기로 편지를 썼다. 다른 선교사들과는 달리 한국의 가정 안에서 살아가는 그녀의 일상을 사진으로 담아 편지와 함께 보내면 그녀의 아버지는 매우 즐거워하시며 회사 게시판에 붙여 놓으셨다고 한다. 가족들은 이 모든 일을 흥미로운 것으로 받아들여 주었고 가족의 그러한 호응과 기도가 낯선 땅에 적응해야 하는 트루디 사모에게 큰 격려가 되었다.

특별한 일 없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복음의 고백으로 하루하루를 살았을 뿐이었으나 하나님은 그녀와 남편 김장환 목사를 통해 시댁에 많은 변화를 이루어가셨다. 유교식의 제사가 있던 집에서 제사가 사라지고 가족들이 하나, 둘 하나님께로 돌아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는 예수 믿으니 제사 때 절하지 않고 기도하겠다고 했던 말들이 식구들에게는 다 간증이었나 봐요. 신기하게도 트러블은 없었어요.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미리 준비시켜 주셨던 것 같아요.”
사실 이 준비는 미국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남편 김장환 목사는 미국에서 공부하는 중에도 편지를 써서 자신이 예수를 믿게 된 과정과 이후의 축복들을 간증하고 전도하는 것을 계속했었다. 성경 말씀도 한글로 써서 보내며 그렇게 조금씩 가족들의 마음을 두드렸던 것이다.
뜻밖에도 가장 먼저 예수를 믿은 분은 다름 아닌 목사님의 세 살 위 형님이었다. 일자리를 잃고 김장환 목사 내외를 따라다니며 목사님의 설교와 삶의 간증, 그리고 앞으로의 비전을 듣곤 했던 형님은 두 달 만에 예수님을 믿고 술, 담배를 끊었다. 그러자 아내도 너무 기뻐서 예수님을 영접했고 이어서 어머니와 형님들, 조카들이 줄지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제일 큰아버지가 믿으면서 자연스레 제사가 추도식으로 바뀌었고, 시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그때까지 집안에서 치르던 장례를 기독교회관에서 치르며 동네의 많은 사람을 전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열매는 1973년, 빌리그레함 목사님의 전도집회 때 남편 김장환 목사의 통역에 역사하신 성령과 그로 인해 돌아온 수많은 한국의 영혼들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트루디 사모의 순전하고 조용하고 깨끗한 헌신을 이 같은 놀라운 열매로 돌려주셨다.

사모님, 놀러 가도 돼요?

처음 한국에 갔을 때, 수원에 교회라곤 두세 곳이 전부였다. 이때부터 트루디 사모는 남편 김장환 목사와 함께 주일마다 교회들을 찾아 탐방했다. 한국교회의 모습이나 설교의 현장을 보고 배우려는 김장환 목사의 열심 때문이었다. 미국교회와는 매우 다른 풍습과 문화를 가진 한국교회의 모습은 그녀에게 너무나 신기하고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원에 있는 한 침례교회의 목사님께서 김장환 목사에게 저녁예배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하셨다. 팔순이 넘으신 연세와 건강으로는 혼자 목회를 감당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부목사 비슷하게 시작했던 일이 목사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자연스럽게 교회를 맡아 담임목회로 이어지게 되었고 그것이 지금의 수원 중앙침례교회의 시초가 되었다. 처음엔 40명 정도의 성도에서 시작했으나 교회가 성장하면서 기독교회관과 체육관을 건립했고 이곳에서 학생들 전도를 위한 영어성경공부와 유치원 사역을 하게 되었다.

트루디 사모의 꾸밈없는 친화력과 적극성은 한 교회의 담임목사 사모로 살아가는 그녀의 방식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났다. 언어의 한계 때문에 전통적인 사모의 역할을 할 수 없었음에도 그녀는 위축되거나 몸을 사리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기쁘게 감당했다.
“말을 잘 못하니 조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래도 동네 아주머니들과 여자들이 저희 집에 참 많이 오고 갔어요. 동네 아주머니들이 오시면 제가 과자를 만들어 차와 함께 대접했어요. 우리 어머니도 여름에 마시는 아이스커피를 만들어 드리면 너무 좋아하셔서 어머니 친구분들도 자주 데려오시고, 그냥 그러는 사이 저절로 동네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되었죠. 그분들도 저에게 배우려 하시고 저도 그분들께 김장이라든가 한국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열심히 묻고 배웠어요.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교제하게 되면서 친구들도 많이 생겼지요.”
아이들이 태어나고 학교에 갈 무렵에는 더 많은 관심과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학교 선생님들의 권유로 아이의 학급에서 영어노래나 미국이야기들을 들려주기도 했고 학급 아이들을 직접 집으로 초대해 과자를 만들어주거나 쉽고 재미있는 영어책들을 읽어 주기도 했다.
뺑코라고 놀림도 받고 종종 신기해하며 어린 아기를 만지려는 아이들 때문에 어려움도 있었지만 천진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트루디 사모는 더 편하고 좋았다. 단연 그녀는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어 아이들이 늘 그녀의 집에 놀러오고 싶어 했다. 함께 먹고 어울리며 아이들로 북적이는 그녀의 집은 말할 것도 없이 흡사 유치원 같았다. 이처럼 사람들 속에 적극적으로 섞이고 자신을 열어 나누는 일, 그것이 그녀가 가장 기쁘게 감당했던 전도방식이었다. 그녀는 어느새 그렇게 ‘한국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파이 굽는 원장님

둘째 아들 요한이 갓 1학년에 진학할 무렵 중앙기독유치원을 개원하게 되었다. 트루디 사모의 삶의 방식들로 인해 교회 안의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교인 학부모들 사이에서 아이들이 신앙교육과 함께 매일 양질의 교육을 받았으면 하는 바람이 커졌다. 천주교와 장로교 교회들도 유치원 시설을 가지고 있었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우리도 하자.”라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비하심인 듯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고 여기에 교육학과를 나온 트루디 사모가 운영의 적임자로 지명되었다.
유치원 운영은 트루디 사모에게 큰 도전이자 도움이 되었다. 아무래도 유치원 운영에 전념하면 심방과 같은 사역은 많이 할 수 없었지만 유치원 사역의 가치를 인정한 성도들은 그마저도 이해해 주었다.
“유치원은 인기가 대단했어요. 신앙 있는 좋은 선생님들만 뽑고 선생님들도 함께 기도를 많이 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밤새도록 사람들이 줄 서서 등록을 하려고 했어요. 처음엔 두 반으로 오전, 오후 반 40명씩 80명으로 시작해서 2, 3년 후에 4반, 6반, 8반, 나중에는 14반, 16반까지 늘어났어요. 너무 커져서 초등학교 시작할 때는 인원을 줄여야 했지요. 다 초등학교로 진학할 수가 없었으니까요. 이후 초등학교는 학년마다 두 반씩 1, 2, 3학년을 뽑았고 해마다 한 학년씩 늘려갔어요.”

유치원 사역이나 이후 큰아들 김요셉 목사와 함께 시작한 초등학교 운영에서 무엇보다 중점을 둔 것은 교회와 가정과 학교가 분리되지 않은 통합교육이었다. 단순히 아이들에게 지식을 잘 전달하는 것을 넘어 그들의 인성과 신앙을 제대로 키워내고자 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교사와 학부모를 세우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마더와이즈’ 같은 프로그램의 운영은 그 실천적인 좋은 예가 되었다. 100여 명의 엄마들과 교사들이 참석하는 이 프로그램에서는 젊은 엄마들이 자녀의 신앙교육뿐 아니라 다른 공부를 도와주는 방법을 알려주고 부부관계, 자녀와의 관계에 대한 방법이나 또 직장생활 등으로 바쁜 엄마들이 지혜롭게 양육하고 관계하는 방법을 지도해준다. 교사들이 먼저 훈련을 받고 엄마들을 가르쳐주게 되니 학교 교육이 철저한 가정과의 연계 속에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통합교육 일환의 하나로 시도된 것이 장애인들과의 통합교육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장애인이나 비장애인이나 차별이 없으며 장애인들도 자연스럽게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트루디 사모는 특수교육 교사를 채용하고 장애인들의 장학금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파이를 구워 파는 파이샵을 열었다.
어찌 보면 파이샵은 베풀고 나누는 삶에 익숙한데다 적극적이면서도 활발하고 무슨 일이든 성실히 몸을 아끼지 않는 그녀의 특징이 잘 집약된 사역이라고 볼 수 있다. 단순히 운영하고 가르치고 지시하는 자리에서 내려와 직접 발로 뛰고 부딪히고 섬기면서 그녀는 진정한 통합교육의 모습을 아이들에게 몸소 보여준 셈이다. 실제로 파이샵에서 많은 교제와 나눔, 상담과 치유의 사역들이 이루어진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삶으로 가르치는 것만 남는다

“몇 년 전에 제가 체육관 수영장을 청소하고 있는데, 어떤 분이 저를 가리키며 제 며느리에게 외국인 청소부를 어디서 구했느냐고 묻더래요. 그런 재미있는 일들이 많았어요.”
비단 파이샵 뿐 아니라 유치원이나 학교 어디서든 허드렛일을 하고 있는 그녀를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잔디를 뽑거나 쓰레기를 치우거나 걸레를 빨거나 하수구를 뚫거나 하는 일은 그녀의 자연스러운 일상이었고 그러한 모습들은 그녀의 자녀들이나 학교의 수많은 학생과 교사들에게 잊지 못할 감동의 메시지를 남겼다.
이제는 목사가 된 두 아들과 미국에서 소외계층을 위한 교육가로 활동하는 딸의 삶에는 트루디 사모의 삶의 방식과 흔적들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몇 년 전 「삶으로 가르치는 것만 남는다」를 출간한 큰아들 김요셉 목사의 간증에는 김장환 목사와 트루디 사모의 삶 자체가 얼마나 단단하게 그의 교육 철학을 이루고 있는 근간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지닌 사람으로 존재하도록 가르치는 일, 그것은 기본적으로 그의 가정이라는 공간에서 가장 뿌리 깊고 중요하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가정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가정을 잃어버리지 않고 지키면서도 엄마가 얼마든지 배울 수 있어요. 목회를 하면서도 사모들이 꼭 교회에서만 일해야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먼저 가정에 충실해야 전도가 되는 것 같아요. 가정에 소홀하면 전도가 어려워져요. 제일 많은 시간은 가정에 투자해야 해요. 자식을 돌보면 교회에 소홀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아침 일찍 일어나 묵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아이들과 함께 말씀을 암송하는 것은 그녀의 자녀들뿐 아니라 지금도 유치원 아이들에게 전해주는 소중한 신앙훈련이다. 덕분에 유치원이나 학교에서는 청소나 섬김, 기도와 큐티 등의 일들은 이제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또 학교에서 행해지는 안식년 제도를 통해 선교체험을 할 수 있도록 도전하는 일들도 트루디 사모 자신이 선교사로 살았기에 훨씬 더 영향력 있게 이루어지고 있다. 7년마다 각자 필요한 선교지로 나갈 수 있도록 후원해서 언제든지 다른 곳에서도 사역이 가능하다는 열린 인식과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다. 욕심내지 않고,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서 살 수 있다는 ‘단순한 삶, simple life’에 대한 교육을 위해서다.
하지만 가장 큰 가르침은 아마도 트루디 사모 자신이 스스로 배우려고 하는 모습일 것이다.
실제 그녀의 자녀들이 신학교 다닐 때 대학원을 다니기도 했고 영적인 도전을 위해 양질의 책들을 읽는 것을 계속한다는 그녀는 여전히 새로운 경험과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충만했다.
“새로운 것을 계속 배우고 싶어요. 새로운 사람 만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하나님 뜻과 인도하심 가운데 있는 것이 저의 가장 큰 기도제목이에요.”

깨어진 질그릇에 묻어난 그리스도의 향기

사실 그녀는 최근에 가장 깊고 큰 배움의 시간을 가졌다. 다발성 골수종이라는 암으로 투병 생활하다가 회복된 지 불과 얼마 되지 않은 까닭이다. 큰 수술과 재활치료의 어려운 시간을 보냈지만 그녀는 그 시간들을 통해 평소 아무렇지 않게 했던 행동들에 대해 새롭게 감사하게 되고 하나님과 더욱 깊고 친밀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투병과정의 아픔과 힘겨움을 토로하는 대신 가족들의 극진한 보살핌을 통해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다는 그녀의 얼굴엔 따뜻한 온기와 평화로움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고통의 시간이 하나님을 배우는 시간이었다고 고백하는 그녀에게는 진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난다. 자신의 그릇을 치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질그릇을 깨어 그 안에 담긴 그리스도를 흘려낸 향기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선교사의 사명으로 한국에 온 그녀의 삶엔 거창한 구호나 요란한 결사각오는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의가 아닌 온전히 그리스도의 의가 그녀의 선교의 삶을 이끌어 가도록 내어 맡긴 결과가 아닐까? 그래서 그녀는 가난한 한국 남자와 결혼했고 가난한 한국 땅에 뿌리내렸으며 가난한 촌부로, 넉넉한 동네 아줌마로, 파이샵의 일꾼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사도바울의 이 고백을 가장 사랑한다는 그녀는 그녀의 삶 전체를 통해 우리 민족과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참된 사랑을 증명해 주었다.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고백이 성육신임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삶과 죽음과 부활로 보여주셨던 것처럼 말이다. 심겨진 곳이 어디든 그곳에서 꽃 피우고자 했던 그녀의 삶은 분명 아름답게 만개한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한국 땅에 심겨 썩어진 그녀의 삶이 무성한 가지와 열매를 맺으며 또 다른 수많은 영혼의 씨앗들을 소리 없이 키워가고 있는 것을 본다.

  
트루디 사모
수원중앙침례교회의 원로이자 현 극동방송 사장인 김장환 목사의 아내이며, 수원 중앙기독유치원의 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최근 저서 「심겨진 그곳에 꽃 피게 하십시오」(나침반)을 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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