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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하나님의 은혜 - 이경미 사모(태국한인교회)

2012.12.27 14:06

조회 수:2063 추천:3



아! 하나님의 은혜



태국으로 부름 받다
1993년 남편이 강도사로 인천의 모 교회를 섬길 무렵, 두 아들의 어머니로 한 남자의 아내로 평범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느닷없이 태국에서 진행하는 해외선교수련회(Overseas mission in Thailand)에 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2주간 진행되는 프로그램으로 항공료를 포함 참가비가 70만 원이라는 것이다. 두 아이와 함께 하루하루 사는 것이 버거웠던 때에 남편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던 어느 날 K 집사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K 집사는 나에게 아무런 용건이 없는데 전화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모님 혹시 무슨 걱정이 있으세요?” 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망설이다가 남편이 최근 태국에 가야 한다고 하는데 보내줄 형편이 못 되어 걱정하고 있다고 했다. K 집사는 내 얘기를 듣자마자 하는 말이 “최근 우리 집에 생각지도 않은 목돈이 생겨서 어디에 쓸까 기도하고 있었는데 강도사님께 드리라고 주신 거군요.” 하면서 즉시 돈을 가지고 달려왔다. 놀랍게도 남편이 태국에 가는 경비에 딱 맞는 액수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1995년 1월, 남편을 따라 두 아들(7살, 6살)을 데리고 태국 방콕에 도착했다. 작은 아이는 한국에서 입고 간 내복을 방콕 돈므앙 공항에 내려서도 벗지 못하고 짜증을 부리고 있었다. 밤늦은 시간 환영 나온 GMS 선교사님들과 태국한인교회 성도님들의 따뜻한 환영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족은 지난 2년간 이곳에 오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미 많이 지쳐 있었고 막상 현지에 도착하니 무더운 날씨에다 여행의 피로가 겹쳐 쉼이 필요했다.
태국에 도착한 지 13일째 되던 날은 주일이었다. 태국한인교회 지역예배에 처음 참석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7살, 6살 두 아이를 집에 남겨두고 나오는데 작은 아이가 울면서 떨어지질 않았다. 나는 어차피 겪을 일이기에 모질게 마음을 먹고 두 아이를 떼어놓고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그 이후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내가 집을 나선 기억 외에 그 이후 벌어진 일들은 남편의 이야기를 통해서 듣고 알게 된 것들이다.
남편이 쓴 당시의 일기에 의하면, 내가 택시를 타기 위해 남편의 손을 꼭 잡고 마을 앞길(SOI) 건널목을 반쯤 건넜을 때 갑자기 남편의 손을 뿌리치고 먼저 길을 건너려 하다가 반대편에서 총알같이 달려오는 오토바이에 정면으로 치어 남편의 눈앞에서 날아가 버렸다는 것이다. 꿈과 같은 일이 현실이 된 것이다.
30일 동안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병원에서 뇌수술을 받고 회복 중이던 나는 두 달이 시작되는 첫날 처음으로 남편을 알아보았다. 뇌가 깨어난 후 부러진 왼쪽 다리 접합 수술이 시작되었고 그 후 40일을 더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가끔 생각한다. 왜 하나님은 나를 태국에 도착한 지 2주도 채 안 되었을 때 교통사고라는 시련을 주셨던 것일까?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라는 신호였을까? 아니면…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이제까지….
나의 태국 생활 첫 5년은 이렇게 교통사고와 그 후유증으로 아내로서도, 엄마로서도 역할을 다하지 못하였다. 특히 어린 두 아들이 학교에 가고 오는 것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빚으로 남아 있다. 벌써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큰 아이와 아직 군복무 중인 둘째 아이를 볼 때마다 ‘아! 하나님의 은혜’를 외치지 않을 수 없다.
71일간의 병원 생활을 마치고 퇴원하여 집에 돌아온 후에도 나는 뇌수술 후유증으로 정상적인 생활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17년이 지난 지금도 무리하거나 피로가 쌓이면 오른편 반쪽에 마비 증상이 온다. 정상인보다 수면을 많이 취해야만 활동하는데 지장이 없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에게 힘든 일이 있다면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일이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사모로서, 선교사로서 누구보다 기도에 힘써야 함을 잘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선교적 교회, 태국한인교회
태국한인교회는 2012년 올해로 세워진 지 22년이 되었다. 성도들 대부분이 주재원으로 구성된 교회로 3년 정도 지나면 성도들의 70% 이상이 새로운 사람으로 교체된다. 새로운 성도가 계속해서 들어오지 않으면 교회가 유지될 수 없었음에도 지난 22년 동안 한 번도 그런 어려움을 겪어보지 못했다. 오히려 교회는 점점 왕성해지고 있다. 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1%의 복음화가 채 안 되는 선교지 태국 땅에 세워진 디아스포라 한인교회이기에 더 연약할 수밖에 없다. 삶의 뿌리가 뽑힌 채 해외에 옮겨 심겨진 디아스포라 태국한인교회는 이 때문에 더더욱 연약한 현지 교회들의 그늘이 되고 힘이 되는 교회가 되기 위해 노력해 오고 있다. 교회 설립 초기부터 일반 이민교회와는 다르게 현지 교단(Church of Christ in Thailand)에 가입하여 현지 교회 속에 들어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100여 개 남짓 되는 7 노회 교회 가운데 1년 상회비(약 3천만 원)를 가장 많이 내고 있는 교회이기도 하다. 성도들이 부자여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태국한인교회는 선교사를 한 명도 파송하지 않은 교회지만 어느 교회보다 선교적 교회를 지향하고 있다. 설립 초기부터 현지 태국인 교회를 방콕 외곽에 개척하여 세우고 있는데 현재 3곳 가운데 두 교회가 자립한 교회로 성장하였고 나머지 한 교회는 부흥 중이다. 안타까운 일은 마지막에 세워진 교회(츤반테파락) 담임목회자(에까락 전도사)가 한 달 전 간암 말기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이다. 피롬야 사모는 남편을 하나님이 데려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로 첫째, 교회가 한창 부흥하는 중이기에 사명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둘째, 슬하에 어린 남매 둘이 있는데 역시 이유가 된다는 것이다. 셋째, 아직 남편이 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살려 주실 것임을 확신한다고 한다. 아내가 교통사고를 당한 것에 대하여 무슨 잘못이라 하신 듯 말씀이 없으신 하나님, 그분은 많은 일들에 있어서 침묵하신다.

학교에 있어야 할 아이들이 아파트에서 놀고 있다
오래전부터 교민 자녀들이 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신자, 비신자를 가리지 않고 매년 약 2천만 원의 예산을 책정해 10~15명의 학생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지난 2009년 세계외환위기가 찾아왔을 때, 많은 성도들이 실직하고 방콕을 떠나는 중에도 교민 자녀들이 학업을 중단하지 않도록 오히려 장학예산을 2배로 증액하기도 했다. 물론 예산이 충분하지 못해 예산액의 80%만 지출해야 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잘한 일이라 생각된다.
동네에 세탁소가 하나 들어와도 이웃 사람들이 화분을 선물하며 사업번창을 기원하던 시절이 있었다. ‘세탁소 하나가 들어와도 이웃주민들과 주고받는 것이 있는데, 마을에 교회가 하나 세워질 때는 어떠해야 하겠는가?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세탁소 하나만도 못해서야 되겠는가?’ 하는 서글픈 생각을 했던 때가 있었다.  
한 번은 한 중년 여인이 초췌한 모습으로 찾아왔다. 그분은 눈물로 자신의 말을 대신했다. 삶의 현실이 너무 아파서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로 말을 이어갔다. 태국에서 사업하기 위해 이민하여 모든 재산을 투자해 올인했는데 하는 일마다 실패하여 이제는 두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것은 물론 당장 생활이 어려워진 것이다. 그 중년 여인의 두 남매가 벌써 모두 대학생이 되었다. 큰 아이는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고 있다.
IMF가 오고 금융위기가 찾아오면서 학업을 중단한 교민 자녀들이 많았다. 학교에 가야 하는 평일 날인데 동네에 아이들이 뛰어논다는 말을 듣고 가슴이 너무 아팠다. 그래서 시작한 장학사업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지금도 방콕 교민들의 자녀교육 문제는 이민사회가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침묵 뒤에는 은혜가 있다
지난해 6월 초순 비가 내리는 주일 아침, 1부 예배 찬양대원으로 봉사하던 J 집사님 내외분이 찬양대 연습 시간에 맞춰오기 위해 이른 아침 집을 나와 집 앞 큰길을 건너다가 달려오는 트럭에 치여 내외분 모두 한날 숨을 거두셨다. 온 교회가 슬픔에 잠겼다. 왜 하필 주일예배에 오시는 분을 하나님 이렇게 데려가십니까? 하나님은 침묵하실 때가 많다. 교회가 조롱받을만한 일이 생긴 것이다. 이때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을 해주시면 좋겠는데 침묵하신다. 끝까지 침묵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이 답답해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침묵은 침묵이 아니라 더 큰 외침이라는 것을 시간이 흐른 뒤 깨닫곤 한다. 태국 땅에 오자마자 당한 교통사고만 아니었다면 지금 더 많은 일을 남들보다 더 왕성하게 할 수 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셨을까? 하나님은 아직까지 침묵하신다.
성도 두 사람이 심하게 다투고 있었다. 나는 누구의 편도 들어줄 수 없었다. 사모로서, 한 목회자의 아내로서 알면서도 모르는 척해야 했고 할 말이 많았지만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것이 성도를 위한 길이고 교회를 위한 길이었다. 주님도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입을 열지 않으셨지 않았는가? 요즘엔 더 많이 침묵의 위대함을 깨닫는다. 때때로 답답해 보이지만 침묵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도구가 됨을 확신한다. 태국에서의 지난 17년을 돌아볼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있다. ‘아! 하나님의 은혜’ 그것이다. 나 같이 무능력하고 부족한 자를 하나님이 지금도 사용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작은 아이가 중학교 3학년 때 머리를 노란색으로 염색하고 싶다고 했다. 너무 간절히 사정하기에 허락을 했다. 얼마 지난 후 아이는 귀에 링을 달고 들어왔다. 시간이 좀 더 지난 후 귀에 링을 세 개를 달고 왔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집을 나가 들어오지 않았다. 나흘을 들어오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목사 아들이 가출을 한 것이다.
사춘기를 조금은 심하게 겪었던 그 아이가 지금은 군대에서 군종병으로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 나는 두 아들이 너무 기대된다. 지금의 모습 때문이 아니라 앞으로의 모습 때문이다. 주님이 어떻게 이끄실지 생각하면 때로는 몸에 전율이 느껴진다. 그래서 ‘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글/이경미 사모
칼빈신학교 유아교육과를 졸업하였으며 1995년 GMS 선교사로 태국 방콕에 부임. 현재 태국한인교회 김용섭 목사의 아내로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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