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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십자가 아래에 있는 교회 - 이상규 교수

2016.06.14 15:37

조회 수:920 추천:2


 

십자가 아래에 있는 교회

- 로마제국 하에서의 기독교 박해 -

 

이상규 교수(고신대학교 신학과)

 

기독교는 처음부터 박해를 받았다. 처음에는 유대교로부터 이단시 되어 탄압을 받았고, 기원 64년부터는 로마제국의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 로마제국에서만이 아니라 기독교는 전파되는 곳마다 박해를 감수해야 했다. 그래서 존 폭스의 순교자 열전서문을 썼던 윌리엄 브람리 무어(W. Bramley-Moore)기독교회의 역사는 순교의 역사 그 자체이다라고 했다. 초기 기독교 교부였던 테르툴리아누스는 그의 변증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계속해서 광적으로 우리를 죽이고, 고문하고, 정죄하며 학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더 많이 쓰러질수록 우리의 수는 더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피는 씨앗입니다(Semen est sanquis christianorum).” 순교자의 피가 교회 성장의 기초라는 의미였다.

신앙의 증거는 곧 순교를 의미했다. 이 점은 그리스어에서도 잘 드러난다. ‘증거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말투스(μρτυς)순교자라는 뜻이기도 하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이를 증거하다 죽은 이들을 증인’(μρτυρς)이라고 불렀는데(22:20, 딤전 6:13 17:6) 이 말은 후에 순교, 혹은 순교자를 의미하게 된 것이다. 이 글에서는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종교로 공인되기 이전까지, 4세기 초까지의 기독교 박해와 순교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300년간에 걸친 로마제국의 박해

나사렛 예수를 중심으로 새로운 종교운동이 일어나자 유대교는 이들을 나사렛 이단”(24:5)으로 간주하고 박해하기 시작했다. 스데반은 첫 순교자였다. 베드로와 바울은 투옥되었고, 사도들은 고난의 길을 걸어갔다. ‘그리스도인으로 불렸던 이들은 첫 30여 년간 유대교의 박해는 받았으나 로마제국의 물리적인 박해는 없었다. 그러다가 64년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주 그리고 신’(dominus et deus noster)이라고 불리던 황제숭배를 거절한다는 이유에서 불법의 종교로 간주되었고, 로마제국의 박해를 받기 시작했다. 이 박해는 313(동부 323)까지 계속되었다. 그래서 기독교는 로마제국에서 300년간 박해받았다고 말하게 된 것이다. 물론 간헐적인 자유의 기간이 없지 않았으나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진다. 64년 네로(Nero, 재임 기간 54~68) 황제 박해로부터 250년 데시우스(Decius) 황제까지, 둘째 시기는 데시우스 황제로부터 313년 콘스탄틴의 박해 종식까지가 그것이다.

기독교가 첫 30년간 정치적 박해를 받지 않았던 것은 로마제국의 유대인 정책 때문이었다. 로마제국이 볼 때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이었고, 이들은 유대교의 한 분파라고 생각했다. 유대인들은 기독교도를 이단적 분파로 간주하였으므로 로마제국은 이것을 유대교 내부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었다(18:14-15). 그러나 바울의 전도로 이방인들, 곧 비유대인 가운데서도 개종자가 생겨나자 기독교는 민족종교인 유대교와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네로 시대의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바로 이런 새로운 자각에 기초하고 있었다.

 

로마의 대화재

그러나 직접적으로 박해의 시원이 된 것은 64618일 로마시에서 발생한 대화재였다. 화재는 키루쿠수 막시무스(Circus Maximus)의 남동쪽 구역에서 발생하여 강한 바람을 타고 전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일주일간 계속된 화재로 당시 로마의 14구역 중 3개 지역이 전소되었고, 7개 지역은 부분적으로 불탔다. 이 화재가 황제의 의도적 방화였다는 의심을 사게 되자 네로는 화재를 모면한 로마시의 두 구역이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임을 착안하여 기독교인들에게 방화의 혐의를 씌웠다. 국민적 신임을 잃고 있던 그는 기독교를 희생양으로 삼아 탄압함으로써 다수의 이교도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의 신격화나 황제숭배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이교(異敎) 사회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자 했으므로 반사회적 집단으로 매도되기도 했다. 또 눈에 보이는 신을 숭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신론자로 공격을 받기도 했다. 후에는 비밀집단이자 정치적 결사체로 오인받기도 했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본다면 네로는 기독교인을 탄압함으로써 이교도들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네로의 부인 파파야(Pappaea)가 유대교에 동정적이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유대교의 이단이자 신흥종교 세력인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정치적 효과를 배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기독교 신자들이 방화의 혐의를 받았으나, 곧 황제의 신격화에 대한 거부와 이교적 제전(祭典)에 동조하지 않음으로 반사회적 집단으로 오해되었고 기독교 신자란 단순한 이유(propter nomen ipsum, 벧전 4:16)만으로도 탄압을 받았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자기 고백은 생존의 투쟁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는 물리적 탄압, 구속, 체포, 처형, 재산몰수, 공민권 박탈 등이었다.

 

역사에 기록된 순교자들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에 의하면 최초의 기독교 박해로서 첫 순교자가 발생한 곳은 티버(Tiber) 강 너머에 있는 네로의 정원이었다고 한다. 타키투스와 동시대 사람이었던 쥬베널(Juvenal)은 그의 책에서 기독교도에 대한 박해를 두 번이나 언급했다. 그는 신자들을 산 채로 불살랐다고 기록했다. 기독교도에 대한 박해와 이로 인한 순교를 가장 먼저 언급한 기독교권의 기록으로는 사르디스(Sardis)의 감독(70년경)이었던 멜리토(Melito)였다. 그가 안토니우스(Antoninus)에게 보낸 이 편지글 일부가 다행스럽게도 유세비우스에 의해 보존되었다.

유세비우스는 성경 외의 최초의 순교자는 프로코피우스(Procopius)였다고 말한다. 황제숭배를 거부하여 집정관 앞에 끌려온 프로코피우스는 황제 이름으로 제의(祭儀, libations)를 행하도록 요구받았으나 이를 거부했고 즉각 처형되었다고 한다. 얼마 지난 후 팔레스틴의 다른 감독이 체포되었다. 그는 피부를 가르는 듯한 채찍질로 수없이 맞고, 고문당하여 손마디가 어긋나기까지 했으나 꿋꿋이 참았다고 유세비우스는 기록하고 있다. 핍박자의 의도는 한 개인에 대한 고문만이 아니라 지도자를 배교케 함으로써 기독교운동을 말살하려는 것이었다고 부연했다.

유세비우스는 그의 책에서 안디옥에서 체포된 또 다른 순교자 로마누스(Romanus)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심문관이 화형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당당하게 받아들였고, 그를 나무에 묶고 그 주변에 나무 단을 쌓아 두었을 때는 이제 나를 태울 불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는 다시 고문을 당했다. 혀가 잘리기까지 더할 수 없는 고문을 당했으나 그는 고난 중에도 함께 하는 하나님의 현존을 보여주었다고 기록했다.


1세기의 네로, 도미티안스 황제 치하에서 기독교 박해에 이어 2세기의 대표적인 박해자는 마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161~180)였다. 161년 황제가 된 그는 학식과 지성을 겸비한 스토익 철학자였고, 자신의 수양을 위해 명상록(Meditation)을 남기기도 했으나 기독교에 대해서는 관용을 몰랐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갖가지 재난들, 곧 야만족의 침입, 홍수, 기근, 전염병 등의 창궐은 기독교인들이 제국의 신들을 분노케 한 결과로 보고 기독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기독교 탄압은 이전 시기보다 심각했다. 배교하지 않는 이들은 처형을 당했다. 14살짜리 소년 폰티쿠스(Ponticus), 리용의 감독이었던 90세의 포티누스(Pothinus)도 이때 처형을 당했다. 익나치우스와 폴리카르푸스의 순교에 이어 과부였던 펠리시타스(Felicitas)와 그의 일곱 아들의 순교는 세월의 격리에도 불구하고 눈물겹고 경이로웠다. 유명한 변증가였던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도 이때, 165년 로마에서 순교하였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이 당시 버가모(Pergamum), 아프리카 지방에서도 순교자들이 있었고 특히 고울 지방에는 17748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처형되었다고 썼다.

 

끝까지 신앙을 지킨 고백자

아우렐리우스는 180년 사망하였고 콤모두스(Commodus)가 황위를 계승했다. 193년에는 셉티무스 세베루스(Septimus Severus)가 황제가 되어 처음 얼마 동안 기독 교회에 관용을 베풀었으나, 202년 다시 고통스런 박해가 시작되었다. 국내의 군부 반란과 내란의 위험이 있자 황제는 제국 내의 종교적 통일을 유지할 필요를 느껴 모든 국민에게 소위 정복되지 않는 태양’(Sol inbictus)을 예배하도록 명령했다. 이때 이레니우스가 순교했다는 설이 있고, 오리겐(Origen)의 아버지를 비롯한 일단의 신자들이 알렉산드리아에서 학살당했다.

249년에는 데시우스(Decius, 249~251)가 황제가 되었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는 로마의 옛 명성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가 황제에 취임할 당시 야만족의 침입, 경제적 위기, 사회적 불안이 있었으므로 이것은 옛 신들을 저버렸기 때문이라고 보았고, 옛 신들을 다시 섬기면 로마의 영화도 되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이것이 데시우스의 종교정책의 기반이었다. 그는 한 제국 안에는 하나의 종교만을 허용하고, 기독교라는 종교 자체를 멸절시키려고 했다. 그래서 250년에는 기독교에 대한 혹독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탄압은 이전 시대와는 달랐다. 황제의 목적은 순교자가 아니라 배교자를 만드는 것이다. 황제는 기독교인들을 살해하는 대신 이들을 협박, 고문, 회유하여 변절케 하고 이교(paganism)를 부흥시키고자 했다. 모든 사람들에게 신을 숭배하고 제물을 바칠 것을 요구하였고 이에 응하는 자에게는 증명서를 발부했는데, 증명서가 없는 자들은 범죄자로 간주되었다. 이 시기에는 신자들을 처형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으므로 실제 순교자 수는 많지 않았으나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조직적이고 전국적인 것이었다. 신앙을 끝까지 지킨 이들은 대부분 순교하였는데, 순교는 하지 않았으나 신앙을 끝까지 지킨 이들은 고백자’(Confessor)라고 불렀다. 데시우스는 251년 야만 고트족과의 전투에서 사망함으로써 박해는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가장 비극적인 박해

4세기에 접어들면서 최후이자 가장 비극적인 박해가 발생하였다. 284년 황제가 된 디오클레티안(Diocletian)은 자신을 포함한 4명의 황제들로 하여금 로마제국을 분할 통치하는 정책을 수립하였는데, 그와 그 휘하의 갈레리우스(Galerius)는 기독교에 대해 적개심을 가졌던 통치자였다. 이방신(異邦神, Cybele) 숭배자였던 갈레리우스의 어머니가 박해를 종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갈레리우스가 디오클레티안에게 군부에서 기독신자 축출을 종용하여 상당한 신자들이 처형되었고, 또 갈레리우스는 디오클레티안을 설득하여 303223일 자로 기독신자 모든 관직, 공직에서 축출하고 기독교 관계 건물과 서적의 파괴를 명하는 새로운 칙령을 반포하게 했다. 이때로부터 10년간 박해는 계속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황궁에 두 차례의 화재가 발생했는데 갈레리우스는 이를 기독신자들의 소행으로 몰아 기독교에 대한 보다 강력하고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경전은 불살라졌고 신자들은 처형되었다. 그런데 갈레리우스가 중병에 걸리고, 이것이 기독교 탄압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믿었던 신자들의 말을 들었음인지(?) 311430, 칙령을 내려 기독교 탄압을 중단하였다. 갈레리우스는 5일 후 사망하였다. 기독교 역사가 락탄티우스(Lactantius)는 갈레리우스의 회개가 너무 늦었다고 흥미롭게 기록했다. 이런 탄압의 와중에서 기독교 박해의 종식을 가져올 거대한 정치적 변혁이 예비되고 있었다.

 

 

 

/이상규 교수

미국 Calvin CollegeAssociated Mennonite Biblical Seminary 방문교수, 호주 Macquarie University 초기기독교연구소 연구교수, 고신대학교 부총장을 역임. 현재 고신대학교 신학과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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