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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올 것이 왔다.

‘디사이플’에서 기획한 주제가 ‘은혜를 구하는 사역자 은혜를 전하는 제자가 되자’에 필자가 선택의 은혜를 누리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어디 필자뿐이겠는가? 지상의 모든 사역자는 은혜에 대하여 참으로 할 말이 많다. 은혜로 부름 받았고, 은혜로 파송 받았으며, 오직 주의 은혜로 사역하기 때문이다. 필자의 짧은 글을 통하여 먼저 나 자신이 저 놀라운 은혜에 대양에서 한 춤이라도 은혜의 은혜됨을 퍼 올리기를 소원해 본다. 그리하여 필자 자신이나 이 글과 기획주제를 읽는 모든 이에게 은혜의 폭포수가 임하기를 기도한다. 주여! 은혜를 은혜 되게 하소서. 


Ⅰ. 은혜로 충만한 

교회 필자가 섬기는 새로남교회는 은혜로 충만하다. 그 이유를 말하겠다. 현재 새로남교회 출석하고 있는 교우들 가운데 은혜라고 하는 이름을 가진 교우는 47명 그리고 한때 우리교회 몸을 담았던 교우들 75명까지 합하면 122명이다. 한 지역 교회에 122명의 은혜가 몸 담고 있으니 어찌 은혜로 충만하지 않다 말할 수 있겠는가? 

  예배당을 건축하고 나서 각 각의 공간에 이름을 부여할 때 글로리홀, 그레이스홀, 글로벌홀로 명명하였다. 은혜 없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 수 없고, 은혜 없이는 열방을 가슴에 품을 수 없다는 소원과 절박함이 묻어 있는 홀 이름이다. 심지어 우리교회 두 부서로 운영되는 고등부 명칭이 코람데오(Coram Deo)와 헤세드(Hessed)이다. 청소년의 시기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뿐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붙잡혀 살기를 원하는 담임목사의 마음을 담은 것이다. 필자의 교회는 작년에 교회설립 30주년을 맞았다.(1986-2016)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그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마음의 다짐으로 Amazing Grace(놀라우신 은혜)라고 전체 주제를 잡았다. 그리고 주님께서 허락하신 은혜의 발자취를 한 세트 세권의 책에 담아내었다. 

(1. Amazing History/역사 2. Amazing Ministry/사역 3. Amazing Saeronam/새로남) 필자는 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한 지역교회인 우리 교회가 설 수도, 앉을 수도, 뻗어 갈 수도, 유지 할 수도 없음을 뼈 속 깊이 안다. 그리고 계속 절박하게 알아 갔으면 좋겠다. 


Ⅱ. 은혜란 무엇인가? 

신학사전 (Baker’s Dictionary of Theology)에서 파커(T.H.L Parker)는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출애굽기 33:13)절을 근거로 구약에 나타나는 은혜의 개념을 정리하였다. 


곧 신약의 ‘은혜’에 해당하는 카리스의 의미와 일맥 상통한 은혜의 개념을 ‘헨’과 ‘헤세드’로 규정하였다. 모세에게 임한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을 ‘헨’으로 표현하였다. 곧 전혀 누리거나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하나님의 호의이다. ‘헤세드’란 말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나 자비하심으로 이해되는데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맺으신 언약과 관련되어 있음을 본다.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렘 31:3)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신 7:12) 


신약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담고 있는 단어는 ‘카리스’이다. 카리스는 기쁨이라고 하는 의미도 담고 있다. 신약에서 ‘카리스’는 ‘헨’이나 ‘헤세드’와 연관되어 있다. 예를 들면 헨과 관련된 카리스는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6)이나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엡 2:7) 카리스가 헤세드와 연관된 예는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성경이 우리에게 확실하게 보여주는 은혜의 개념은, 우리 구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을 이룬다. 곧 예수그리스도 없이는 은혜를 이해할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은혜의 본질은 대가없이 거저 주심에 있다. 진실로 자범죄와 원죄로 말미암아 저주와 사망을 예외 없이 필연적으로 당해야 하는 죄인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은혜가 죄인들에게 유일한 소망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처절하게 이루어져 있는지를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정확히 표현하면 우리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목도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베푸시는 은혜에 입문할 수 없다. 파커가 내린 은혜의 정의이다. 

“은혜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애로운 결정이며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으로부터 베풀어지는 것이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음에는 전적 무능력자이다. 은혜는 율법의 행위와 정반대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은혜는 아낌없이, 아무 공로도 요구하지 않으면서, 예기치 않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유익과 기쁨, 위로를 뜻한다. 그것은 죄인이자 원수였던 우리가 아들과 상속자로 대우받게 되었음을 뜻한다.” 한슨(R.P.C. Hanson) 

 

Ⅲ. Sola Gratia! 

올해는 그 의미도 절박한 종교개혁 500주년이다. 우리 시대에 500주년을 맞이했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정확하게 이해하자면 Reformation은 종교개혁이 아니라 교회개혁 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회개혁의 정신을 일반적으로 5S로 표현한다. 

1. Sola Scriptura (오직성경) 

2. Sola Gratia(오직 은혜) 

3. Sola Fide(오직 믿음) 

4. Solus Christus(오직 그리스도) 

5.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 영광) 

총신대학 신학대학원의 김광렬 교수는 종교개혁 신학해설시리즈 Sola Gratia에서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는 성도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1. 타락한 인간의 모습들 속에서 그들은 오직 은혜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2.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 속에서도, 그들은 오직 은혜로 그분과의 사랑의 관계 속으로 초대받게 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3.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예수님의 희생적 속죄 사역을 생각해볼 때에도 오직 은혜만으로 우리 죄가 해결된 것임을 깨닫게 된다. 4. 성령님의 사역의 방식을 보아도, 죄인은 오직 은혜만으로 회복의 은총을 덧입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5. 중생 이후 신자의 삶의 모든 여정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계속되므로, 밀려오는 사탄의 온갖 시험과 도전들 앞에서도 신자는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 


Ⅳ.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일명 신도게요서(信徒揭要書)로 지칭하는 장로교회 표준문서 제 18장 ‘은혜와 구원의 확신에 관하여’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주목하자. 

“외식하는 자들과 기타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총애와 구원의 상태에 있다고 하는 그릇된 소망과 육적 오만으로 허망하게 자신들을 속이고 있는데, 그들의 이 소망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진실히 주 예수를 믿고 신실하게 그를 사랑하며 그 앞에서 선한 양심(良心)을 따라 행하기를 힘쓰는 자들은 은혜의 상태에 있음을 금생에 확신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할 수 있다. 이 소망은 결코 그들을 부끄럽게 아니할 것이다. 


Ⅴ. 은혜, 그 충격적인 경험 

팀 켈러(Timothy Keller)는 그의 저서 ‘하나님을 말하다(The Reason For GOD)’(부제: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진실/두란노 2017)에서 은혜를 충격적인 경험으로 묘사했다. 

사역자로 부름 받은 우리 모두 예외가 아닐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총에 눈뜬 모든 이들도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동질의 충격적인 경험의 소유자라 확신한다.

‘어떻게 크리스천이 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확실한 답을 주는 게 중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는 게 본질적으로 테크닉,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우리 손에 달렸다는 인상을 주는 것 또한 위험하다. 하나님을 열심히 찾아야 한다는 데는 두말이 필요 없다. 예수님도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고 친히 명령하셨다. 하지만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누리는 이들은 어김없이 지난날을 돌아보며 주님의 은혜가 끈질기게 따라다녔으며 결국 새로운 현실에 눈을 뜨게 했음을 인정한다.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우리가 가진 타락한 본서의 실체와 하나님의 철저하고도 폭발적인 은혜가 한 점에서 만난 것이다. 선하고 행복해지고자 하는, 또는 진실해지려는 노력이 도리어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막상 일이 벌어지고 완전히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는 전혀 알지 못한다. 이러한 사실은 사도바울과 어거스틴, 마르틴 루터, 존 웨슬리를 비롯해 수많은 영적인 거장들의 전기에서, 또는 삶이 백팔십도 달라진 우리 교회 교인 수천 명의 간증을 통해 얼마든지 보여 줄 수 있다. 

천로역정(天路歷程/The Pilgrim's Progress/원제목은 〈The Pilgrim's Progress from this World to that which is to come)은 존 번연(John Bunyan)의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죄인으로서 자신의 감격을 담아낸 자기 고백이자 순례기이다. 번연은 그 감격을 ‘죄인의 괴수에게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Grace Abounding to the Chief of Sinners(1666))로 담아내었다. 필자 자신도 그러한 고백을 할 수 있음 자체가 놀라운 은혜로 다가온다. 


Ⅵ. Post Tenebras Lux 

Post Tenebras Lux는 ‘어둠 후에 빛’이다. 개혁자 존 칼빈의 도시 제네바의 문장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는 과거 한 때 주님 밖에 있었다. 물론 은혜 밖에, 구원 밖에 있었음은 자명하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그 때”와 “이제”를 구분하여 제시하였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2-13) 

에베소 성도들의 심령과 사도 바울의 심령의 공통분모는 동일하게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의 삶에 분수령이 되었다는 확실한 사실이다. 드디어 어둠이 물러가고 광명한 빛이 비추었다. 삶의 방향이 바뀌었다. 의미가 새로워졌다. 신분이 완전히 달라졌다. 개혁자 루터에게도 Post Tenebras Lux가 이루어졌다. 루터는 로마를 방문하였을 때 스칼라 산타(Scala Santa/거룩한 계단/주님께서 십자가 지시기전 판결을 받았다고 전해지는 빌라도 총독관의 28개의 계단.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엘레나가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옮겨온 것)를 무릎으로 기어 올라갔다. 

루터는 자신의 영혼을 연옥에서 구원하고 싶은 갈망으로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라틴어 주기도문을 반복하며 한 계단씩 입을 맞추며 나아갔다. 그러나 그에게 참된 평안은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루터가 로마서 강의를 시작했을 때 그는 “하나님의 의”라는 구절을 접하고 심령에 변화를 경험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동시에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5) 도 그의 영혼에 부딪쳐 왔다. 

루터는 “그때 나는 하나님의 공의는 은혜와 순전한 자비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깨달음의 순간 나는 마치 거듭나 열린 천국 문으로 걸어들어 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루터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전가된 일을 소유하기에 새롭고 의로운 존재로 태어난다는 사실을 확신하였다. 마침내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발견한 영원불변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의 확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는 고백하였다. “주 예수님, 주님은 나의 의가되시지만, 나는 주님의 죄입니다. 주님은 내 짐을 지고 가셨지만, 주님의 것을 나에게 주셨습니다. 주님은 주님이 아닌 것을 스스로 짊어 지셨고 내가 아닌 것을 내게 주셨습니다.”드디어 루터는 하나님의 은총 속에 있는 자신을 확신하고 오랫동안의 어둠 끝에 드디어 생명의 빛을 받게 되었다. 


Ⅶ. 배은망덕(背恩忘德)에서 결초보은(結草報恩)으로! 

필자는 필자 속에서 배은망덕한 DNA가 꿈틀거림을 본다. 동시에 결초보은의 DNA가 춤추는 것을 본다. 필립 얀시(Philip Yancey)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What’s So Amazing about Grace?/IVP 1999)에서 은혜에 대한 통찰력 있는 팁을 제공한다. “은혜란 분명 놀라운 말이다. 과연 우리 시대 마지막 최고의 단어다. 물 한 방울 속에 해의 모습이 숨어 있듯이 복음의 진수가 그 속에 들어 있다. 세상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은혜에 목말라 있다.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이 작곡된지 200년이 지나서 각종 순위 차트에 진입하는 것도 놀랄 일이 못 된다. 안식처 없이 표류하는 세상이 믿음의 닻을 내리기에 은혜만큼 좋은 곳은 없다!” 

리처드 니버(N. Richard Niebuhr)는 말했다. “기독교의 위대한 개혁은 여태 몰랐던 것을 새로 찾아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있는 것을 전혀 다르게 보는 이가 있을 때 발생한다. 어찌된 일인지 바울의 표현대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파하도록 세움 받은 기관인 교회 안에도 은혜가 부족한 것을 볼 수 있다.” 

필자의 삶에서도 얀시의 고백과 니버의 지적가운데서 때로는 방황하는 모습을 본다. 주님의 종으로서 나의 모습과, 목회자로서의 나의 모습 사이에 괴리는 과연 없는 것인가? 분명한 것은 배은망덕한 시대정신을 역류하여 결초보은의 마음을 끝까지 견지하고 싶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은혜는 반드시 감사로 열매 맺음을 체험적으로 안다. 그 감사의 농도와 깊이와 넓이는 은혜에 대한 각성의 농도와 깊이와 넓이에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다. 


제자훈련 목회철학을 부임 조건으로 삼은 필자가 새로남교회 부임하기 전(1994. 11. 6 부임)에 당회에 보내었던 서신중에 일부를 소개하면서 글을 맺고자 한다. 소개하는 이유는 필자 자신과 교회가 계속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잡혀 살기를 원하는 심정 때문이다. 


“堂會員 長老님 한분 한분의 一平生 所願이 “주님의 마음에 合한 長老”임과 同一하게 종의 所願역시 “주님의 마음에 合한 牧師,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종”입니다. 여러 長老님들과 榮光스런 하나님 나라와 새로남교회와 大田의 福音化를 爲한 同役이야말로 恩寵中의 恩寵, 祝福中의 祝福이라 믿습니다. 


주님 앞에 아뢰는 저의 心中의 所願은 새로남 믿음의 家族들 各人과 저의 人格과 삶이 주님의 人格과 使役에 푹 잠겨서 그 은혜와 사랑에 全生涯가 점령당하며 사는 것입니다. 尊貴하신 주님의 이름과 뜻과 나라만이 드러나기를 願합니다. 牧會者로서의 기대와 소망은 地上에서 가장 아름답고 恩惠가 넘치는 堂會를 이루는데 주님의 道具로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이미 堂會員 長老님들께서 가지고 계시는 祈禱題目과 同一한 題目입니다. 모든 주님의 종들이 그러하듯, 長老님들과 부족한 저 역시 하나님의 恩寵과 福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通하여 確認되고 傳達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主後 一九九四年 九月 十三日 



서두에 썼던 대로 필자의 교회는 은혜로 충만하다고 했다. 단지 이름만이 은혜가 아니라 그 영혼과 삶의 현장이 송두리째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은혜로 점령당하고, 통치 받고, 압도당하는 명실상부한 성도들과 주님의 제자들이 구름떼처럼 일어나기를 소원한다. 그리고 최선봉에 오직 주님의 은혜에 붙잡혀 사역하는 필자 자신이 서야 할 것 또한 한시라도 잊지 않기를 소원한다. 


“주여! 은혜 받은 자답게 살게 하시고, 주님의 은혜만을(Sola Gratia) 전파하는 자로 쓰임 받게 하소서!”